'Feel The Arcadia/피사로와 인상파 화가들 展 (01.06~03.25)'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1.17 인상파 화가 피사로 그리고 마네, 르누아르

서인도 제도의 세인트 토마스 섬에서 부르주아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난 카미유 피사로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힘겨운 화가의 생을 시작했다. 그림이 팔리지 않아 피사로 부인이 꽃집에서 일을 하며 번 돈으로 생활을 이어나갔다.

피사로의 아들 모두가 아버지를 따라 화가가 되었지만 사실 피사로 부인은 진심으로 그녀의 자식들의 화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이유는 물론 가난해지기 때문이었다. 가난했지만 피사로 주변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작업을 하는 많은 인상파 친구들 중 경제적인 어려움을 격지 않고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는 화가는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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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로와 함께 퐁테블로 숲으로 사생을 다니던 오귀스트 르누아르 또한 마찬가지로 작은 양복점을 경영하는 아버지 밑에서 어려운 생활을 했다. 그래서 그는 13세부터 도자기 공장에서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며 색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웠던 르누아르는 이 시기부터 점심시간에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명화들을 모사하곤 했다. 공장에 다닌 지 4년이 되는 해 기계화된 시스템에 의해 실직을 하게 되었고 그 후 부채그림이나 상점 장식일 등을 하며 삶을 이어갔다.

이들과는 다르게 에두아르 마네는 법무부의 엄격한 인사부장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화가가 되려는 그의 희망은 피사로와 마찬가지도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치지만 결국 화가의 길을 걸어갔다.

다른 화가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던 마네는 다른 인상파 화가들에 힘이 되어 줬다. 파리 바티뇰구에 있던 마네의 스튜디오와 카페 게르보아에서 마네를 중심으로 청년화가들의 모임을 가지곤 했다.

인상파 화가들은 험난한 굴곡이 많은 삶을 이어갔지만 이들은 서로를 의자고 격려하며 어려운 상황을 이어나갔다. 그 대표적인 예가 1875년 열렸던 인상파 화가들의 경매였다. 1874년 보불전쟁이후 예술에 대한 관심도는 어느 때 보다도 저조했다. 르누아르는 이 상황을 벗어나려 경매을 통해 작품판매를 시도해 보자며 친구들을 설득했다.

르누아르의 제안에 마네는 대중의 관심을 끌기위해 파리 최고의 제담가, ‘르 피가로’지의 평론가 볼프에게 인상파 화가들의 경매의 기사의뢰를 하기도 하였다. 마네의 의도와는 다르게 볼프는 그들의 경매를 비아냥거렸다. 그 시기 화가들이 직접 경매를 조직하는 일은 드문 일 이었으며, 이들의 경매 또한 그들의 삶의 여정처럼 순탄히 이루어지진 않았다. 그러나 이 경매로 르누아르를 비롯한 모네와 세잔 등에게 쇼케라는 후원자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인상파 화가들에게 사회는 항상 등을 돌리며 차가웠지만, 그들은 끝까지 신념을 버리지 않고 새로운 미술에 대한 개척 정신을 지켜나갔다. 1세기가 지난 지금 그들이 피땀 흘려 일궈놓은 새로운 회화의 세계에 우리는 경의와 존경을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지금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그들의 작품 한 점, 한 점, 붓 터치 하나, 하나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우리는 충분히 탐구하고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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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데일.